0402_MERZOUGA→FEZ: The 9th day




선잠을 자다 새벽 4시 경 옆에서 뒤척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무슈 K가 아파서 끙끙 신음하고 있었던 것. 고통이 처음 물렸을 때보다도 더 심해졌다 했다. 대바늘로 뼛속까지 찌르는 느낌이라고ㅠ 내가 아무래도 아저씨들을 깨워야겠다고 했더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안 내켜하던 무슈 K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이젠 그러자 한다.

숙소 문을 열고 나갔더니 밤 사이 기온이 뚝 떨어져 으슬으슬한데다 음산한 바람까지 윙윙 분다. 또 불길한 이 기운. 이 와중에 문제는... 아저씨들 숙소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 서로 까먹고 안 물어보고 안 가르쳐줬어!!ㅠㅠ 하는 수 없이 본관 건물의 방이란 방은 다 두드리고 돌아다녔는데 아무 기척도 없다. 다시 우리방에 돌아가서 아무도 없나봐 어쩌지... 했더니 무슈 K가 인터넷으로 전갈 응급처치법이라도 찾아보게 무선 인터넷 라우터 좀 켜달라 한다. 리셉션으로 갔는데 라우터도 어디 있는지 못 찾겠다. (여담이지만 이 때 인터넷 안된 게 차라리 다행. 나중에 인터넷 검색해보니 전갈 응급처치법은 커녕, 전갈에 물리면 아주 치명적이네, 목숨을 잃을 수 있네 등... 요따구의 이야기 밖에 없었음ㅡㅡ)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번 더 방문을 두드리며 돌아다녔더니 리셉션 바로 옆 방문이 빼꼼 열리면서 남자애 한 명이 잠 덜 깬 얼굴로 부스스 나온다. 아트만이나 모하메드는 아니지만 아주 낯설진 않은 게 식사 때 드문 드문 보였던 직원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남편이 전갈에 물린 자리가 다시 너무 아파져서 병원에 다시 가야할 것 같다 하니 조금 퉁명스러운 투로 이 동네 병원들 지금 다 문 닫았는데.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있냐고 하니 모르겠다면서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보더니 다들 전화도 안 받는단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난감한 분위기 속에서 도움 안되는 대화만 몇 마디 오갔다.

네 남편 진짜 진짜 아프대?
응 진짜 진짜 아프대.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방에 있어.

내가 혹시나 싶어 그럼 리싸니까지 가면 큰 병원이 없느냐고 물으니 아직도 좀 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애가 말했다. 리싸니엔 24시간 여는 병원 하나 있어. 원한다면 내가 같이 가줄게. 리싸니는 여기 메르주가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차로 30분이나 가야하는 곳이다. 나는 운전을 못하니 그럼 환자 본인인 무슈 K가 저렇게 고통에 몸부림 치는 상황에서 운전까지 해야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리고 고맙게도 그 남자애가 운전면허증이 있다며 자기가 운전해주겠다 한다.

중요한 짐만 백팩에 급하게 싸는데 갑자기 지퍼가 뚝 고장나서 다른 가방으로 옮겨 담았다. 불길한 징조 세 번째다ㅠ 그러고 리싸니 병원에 가자고 무슈 K를 데리고 나오는데 그 와중에 무슈 K 하는 말 병원비는 어떡하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렇게 셋이 부랴부랴 리싸니로 향했다. 리싸니 시내에선 남자애도 길을 잘 모르는지 여기저기 행인들에게 병원 위치를 물어보고 다니다 결국 길을 잘 아는 행인 아저씨 한 분을 태우고 같이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남자애와 행인 아저씨가 무슈 K를 부축해서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무렵 무슈 K의 상태는 고통이 심해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ㅠㅠ

그 병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응급 환자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들어오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급하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그런 곳...은 전혀 아니었다. 그 시간에 환자는 한 명도 없었고 그나마도 우리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온 경비 아저씨가 닫혀있던 대문을 열어주셔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한 5분 쯤 기다렸더니 히잡을 쓴 여의사 한 명이 나타났다.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의사는 끄덕끄덕 하더니 주사액이 들은 약병 하나를 보여주면서 이걸 맞으면 괜찮아질 거에요. 한다. 이름은 까먹었지만 아마 진통제 주사 쯤 되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알콜솜으로 상처 부위를 빡빡 닦고 주사기를 푹 찔러 넣는데 무슈 K는 급기야 비명까지 질렀다.

그래도 어젯밤과 달리 이번엔 주사 맞자마자 급격히 편안해지는 무슈 K의 얼굴.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이 쯤에서 의사가 둘뢰흐douleur, 둘뢰흐douleur 하며 뭘 자꾸 물어보는데 무슨 소린지... 그 의사는 영어를 잘 못하고, 짧은 불어 실력의 내게 douleur는 능력 밖의 고급 단어ㅋㅋ 사실 먹는 거 관련된 거 아님 다 고급단어임ㅋ 나중에 사전 찾아보니 douleur는 고통이란 뜻이었다. 아픈 게 괜찮아졌냐고 물어본 모양이었다. 덕분에 단어 하나 아주 뇌리에 잘 박히게 외워졌네.

무슈K가 혹시 전갈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냐고 물어보니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한 소리를 한다. 전갈은 아무 문제 안돼요. 뱀이라면 몰라도.

의사가 처방해준 약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받아들고 병원을 나왔다. 우려완 달리 이 병원도 치료비를 전혀 안 받는다. 감동적이야 아름다운 시스템이다... 꼭두새벽부터 고마웠어요, 의사쌤.




다시 메르주가로 돌아가는 길. 이 때 시간이 오전 7시 쯤 되었고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살 만한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하는 무슈 Kㅋㅋㅋ


 
아까는 그럴 경황이 없어 이제서야 그 남자애와 통성명을 했다. 이름은 아스딘이고, 알고 보니 우리 호텔 직원이 아니라 잠시 놀러와 있는 직원 친구였다. 자긴 메르주가 말고 다른 동네에서 호텔을 운영한단다. 이거 더 미안해진다.  직원인 줄 알았을 땐 나중에 팁이라도 주자 했었는데 손님이라 하니 팁주기도 참 애매하고 대신 줄만한 선물도 없고... 뭘로 감사의 뜻을 표현해야 할지. 얘네 호텔 홍보?;; 그러나 지금 아는 거라곤 얘 이름과 campinglelac 이라는 구글 메일 주소 뿐.  이 빈약한 정보로나마 검색해보니 토드라 협곡 근처 티네히르 쪽에 호텔이 몇 개 나오긴 한데 정확히 어느 건지는 모르겠다. 혹시 토드라 협곡 쪽에서 캠핑하실 생각 있는 분이라면 campinglelac 이란 구글 메일로 문의하시면 친절하고 착한 아스딘이 잘 안내해줄 겁니다. 허허허;;;

무슈 K가 아스딘에게도 전갈에 쏘여봤냐고 물으니 아무렇지 않게 그렇다 한다. 그럴 때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역시 가스를 쓴다고. 아무래도 모로코 남쪽, 특히 사막 근처에선 전갈에 쏘인 정도는 우리네 말벌에 쏘인 정도의 취급인 것 같다. 베르베르인들이 보기에 우린 고작 전갈 가지고 호들갑을 떤 것일 수도ㅋ 그래도 너무너무 아픈데 별 수 있나. 아무튼 원한다면 나중에 우리 페스 올라갈 때 아흐푸Arfoud까지는 자기가 운전해 줄 수 있다고도 해 준 아스딘! 정말 고마웠어!! 

간밤에 잠을 설쳐 피곤했던 우리는 숙소 도착해서 아침 식사 전까지 1시간 반 정도나마 눈을 붙였다. 그러고 9시 반 쯤 방에서 나왔더니 우릴 사막으로 인솔했던 베르베르 청년이 보였다.

전갈을 찾았다며? 크기가 얼만했어?
쪼꼬만 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남들 다 자는 초봄에 나와 설친 정신 나간 전갈놈 같으니라고. 암튼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사막에선 꼭 신발을 신고 돌아다닙시다!!

식당에 갔더니 아트만 아저씨와 모하메드도 와있었고 스페인 가족들도 있었다. 문제 있으면 부르라 해놓고 깜빡 자신들 숙소를 안 알려줬다며 미안해 하는 아트만 아저씨. 알고보니 모하메드 아저씨가 우리 숙소 건물 옥상에서 자고 있었다는데 난 엄한 곳만 뒤지고 다닌 거였다. 그 날씨에 옥상에서 사람이 자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과연 용맹한 베르베르인들이야.
 
그리고 무슈K더러 괜찮으냐고 또 염려해주던 토니 아저씨. 우리가 떠나고 사막의 파티도 끝이었다고 했다ㅋㅋ 게다가 마리나는 전갈이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엄마 위에 누워서 잤고, 새벽엔 무지 춥기까지 했단다. 우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좀 미안스러웠다.




전갈 사건에 내가 혼이 좀 나가긴 나갔었나보다. 웬만하면 먹는 사진만큼은 꼬박꼬박 찍다가 이 날 아침 식사 사진은 깜빡한 걸 보면ㅎ 남은 건 무슈 K가 찍은 아트만, 아스딘 그리고 모하메드(왼쪽에서 오른쪽 순) 셋이 대화를 나누는 사진 뿐이다.


페스의 렌트카 사무실이 저녁 7면 문을 닫으므로 원래 계획은 오늘 아침 일찍 메르주가를 뜨는 거였는데 출발이 좀 늦어졌다. 그래도 오늘 아예 페스에 못 가나 싶었는데 갈 수 있게 된 게 어디야. 와르자잣을 향해 간다는 스페인 가족들과도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도 갈 채비를 마치고 호텔 아저씨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아트만 아저씨가 오늘 마침 리싸니에 장 서는 날이라 가야한다고 우리 차로 같이 가도 되겠냐고 했다. 그래서 흔쾌히 4명이서 리싸니를 향해 출발했다.



아직은 발이 얼얼한 무슈 K의 부담을 리싸니 가는 길 까지만이라도 덜고자 아트만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고, 조수석엔 모하메드 아저씨가 앉았다.




뒷자리엔 우리 부부ㅎㅎ




오늘 우리가 운전해 가야할 경로이다. 메르주가에서부터 페스까지 약 470km. 이 중 1/11 쯤 되는 거리는 아트만 아저씨가 운전해 주실 거다. 구글맵 예상 소요 시간은 6시간. 하지만 늘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곤 하지.




리싸니 시내 풍경. 일단 약국에 가서 처방 받은 약을 사려고 차 세워두고 모하메드 아저씨랑 약국까지 걸어가는데 그 짧은 길 가는 동안 모하메드가 한 열 명한테는 인사한 것 같다ㅋㅋ 아는 사람 되게 많네영 했더니 오늘이 장날, 그러니까 숙Souk이 서는 날이라 그렇단다. 아랍어로 Souk이 시장이란 걸 오늘에서야 알았네ㅎ




처방 받은 약인 파라세타몰. 한 쪽 면은 불어, 한 쪽 면은 아랍어. 영어 따윈 취급하지 않는 쿨함ㅋㅋ 해독약이거나 아니면 소염제인가 했는데 효능에 두통, 치통, 생리통에...! 라고 써있는 걸 보니 그냥 해열진통제ㅡㅡ 아직도 잘 모르겠는 건 무슈 K가 전갈독 해독제를 맞은 적은 있는 건가 하는 거다. 인터넷 찾아보면 말 한 마리도 삽시간에 쓰러트릴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사하라 전갈 어쩌고...만 나오는데 여긴 그냥 독이 몸에서 자연 해독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같단 말이지. 아니, 그보다 그 전갈이 독은 가지고 있었나?




우리는 페스로, 아저씨들은 장으로.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헤어지기 전에 기념 사진 한 방 남겼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다들 오만상이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ㅋㅋㅋ




이제 무슈 K가 직접 운전해서 가야 한다. 이런 비상시에도 그렇고 무슈 K가 졸음 운전 할 때도 그렇고 내가 운전을 할 줄 알면 좀 좋아 싶지만 8년 장롱면허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페스에 7시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네비의 도착 예상 시간은 5시 반 정도로 넉넉하게 나왔다. 좋아. 부지런히 가면 오늘 차를 반납하는덴 문제 없겠어ㅎㅎ



페스 가는 길 남쪽 풍경. 척박한 땅, 헐벗은 산. 여기도 와르자잣에서 메르주가 갈 때 정도 규모의 왕복 2차선 도로이다.




안 그래도 갈 길 바쁜데 망할 네비에게 속아서 또 시간을 허비하면 안되니까 구글맵을 같이 보면서 갔다. 내가 네비로소이다.




에라시디아라는 도시 지나고 갑자기 정말정말 쌩뚱 맞게 오아시스 처럼 나타난... 호수!!?? 주변에 풀 한 포기 없는데 혼자 무서울 정도로 파랬다. 구글맵 보니알 핫산 아다킬Al-Hassan Addakhil 댐이라고 한다. 사진엔 덜 한데 실제로는 정말 청산가리같은 파란색이었다. 그래서 좀 더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블로그에서 본 게 있어가지고 메르주가와 페스의 중간 지점인 미델트라는 시골 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미델트는 기대완 달리 너무 큰 도시였다. 그 블로거가 말했던 식당도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리하여 아쉽지만 미델트는 패스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휴게소에서 대충 점심을 떼우기로 했다.




휴게소를 목전에 두고... 쓰레기 더미를 배회하는 새떼 발견! 멋진 광경이라며 흥분한 무슈 K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사진기를 들고 뛰쳐 나갔다. 이 정도면 무슈 K의 완벽한 부활이다ㅋㅋ




전갈에 쏘인 건 무슈 K인데 피곤하긴 내가 더 피곤해ㅡㅡ 모로코 운전할 땐 조수석에서 맘 놓고 잘 수가 없으니 무슈K 사진 찍는 틈을 타 나는 쪽잠을 청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새들이 다 도망가버렸다며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심ㅋ




점심 먹기 위해 들른 레스토랑. 자이다 라는 마을 근처 휴게소이다.




휴게소 야외 풍경. 다정하게 손 붙들고 가는 아저씨 둘ㅋㅋ 모로코에 있는 동안 남자들끼리 손 붙잡고 가는 걸 은근히 여러 번 봤다. 이슬람 국가라 동성애를 대놓고 표현할 순 없을 거고, 모로코 남자들의 흔한 우정 표현 방식인가보다ㅎ







여기 휴게소에도 어김없이 구걸하는 냥이 등장ㅋㅋ 빵을 뜯어서 주니 잘 받아먹는다. 녀석, 메인 요리 나오고 나서 왔으면 고기도 주었을 것을ㅎ




사실 미델트 로컬 식당 중에서 식육점 같은 곳을 찾으면 그 곳 양갈비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운대로 여기서 양갈비를 시켜 먹었다. 그런데 고기 양이 너무 적음!!




무슈 K가 시켜 먹은 건 또 따진ㅎㅎ




산 아래는 이렇게 따뜻하건만 저멀리 산봉우리는 눈이 덮여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여유를 부렸는지 다시 출발하려고 차 타고 보니 네비 도착 예정 시간이 저녁 6시 30분이었다. 꺄오ㅠㅠ




다시 열심히 고고씽! 이제 슬슬 나무랑 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목이 우거지진 않았어도 완전 민둥산은 아니란 얘기다.
언덕에 뭐라고 아랍어가 새겨져있다.






북쪽으로 갈 수록 속도 단속 경찰들도 더 자주 보였다. 그래도 다 무사히 통과했건만 페스 전의 마지막 도시라 할 수 있는 이프란에서 좌회전 지점 타이밍을 놓친 바람에 급한 맘에 좌회전 금지 사인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을 했더니 아주 그냥 돌자마자 뙇!! 경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뙇!!!!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ㅠㅠㅠㅠ

브라임 아저씨가 경찰한테 걸리면 말을 잘 하면 된댔으니까 이번엔 말 못 알아듣는 척 하지 말고 차라리 싸바싸바를 잘 해보쟈. 그리하여 경찰 아저씨가 너네 여기서 좌회전 하면 안되는 거네, 로터리는 항상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 거네 어쩌고 저쩌고... 나는 좌회전 하면 안되는 줄 정말 몰랐네, 네비가 여기서 좌회전 하라고 시켰네 어쩌고 저쩌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무슈K가 치고 들어왔다. 

 나 전갈에 쏘였다구요!!

엄청난 임기응변! 나도 급 전략 수정하여 우리 지금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전갈이란 말에 경찰 아저씨 정말 화들짝 놀랐다. 전갈??? 어디 병원 가는데요? 여기 이프란? 페스?? 페스 병원 간다 하니 친절하게 이 길로 쭉 가면 돼요하고 길까지 가르쳐 주면서 어서 빨리 가란다. 북쪽 사람이라 그런지 저 사막 지역 사람들과는 다르게 전갈에 대해 아무런 면역 없는 반응. 아저씨 미안해요. 하지만 100% 뻥은 아니라우.

그렇게 이프란의 경찰 체험을 무사히 넘기고 페스에 도착했는데 시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이건 또 계산에 못 넣었네ㅠㅠ 목적지인 렌트카 사무실 도착 예정 시간은 점점 7시 10분 전, 5분 전, 2분 전으로 줄어들고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결국 7시 오바. 타임 아웃! 어차피 내일이라도 반납해야 하니 위치는 알아놓고 가자 싶어서 사무실이 있다는 곳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끝끝내 못찾고 그냥 예약한 숙소 쪽으로 차를 돌렸다.

숙소가 있는 동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구글맵을 보며 숙소인 다르 슈리파Dar Chrifa를 찾아가는데 주차장은 성벽 바깥 쪽에 있었고 우리 숙소는 성벽 안쪽에 있었다. 그리고 성벽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청소년 무리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게 그 명성 자자한 페스의 삐기들인가? 그 중 한 명이 어디에서 왔니, 호텔은 예약했니, 어디로 가니 물으면서 계속 쫓아왔지만 구글맵에 나온 숙소의 위치가 메르주가 숙소 때만큼이나 정확해 한큐에 찾을 수 있었고 그 청소년 삐끼는 숙소 초인종을 누르는 우리에게 여기 묵는 거야? 여기 참 좋은 숙소지. 페스에 온 걸 환영해. 하고는 사라졌다ㅋㅋ

체크인한 시간은 저녁 8시. 꽤 늦은 시각이라 숙소에서 저녁을 먹을까 했더니 그건 미리 예약을 했어야 한단다. 하는 수 없이 밖에 나가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이 주변은 밤에 좀 위험하니 레스토랑 에스코트를 불러줄게 어때? 해서 안전 민감증인 무슈 K가 단번에 오케이 했고 잠시 후 우리는 어떤 에스코트 소년을 따라 레스토랑 리아드 다르 바싸Riad Dar Batha로 향했다. 그 에스코트 소년은 영어도 불어도 잘 못해서 가는 동안 심도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대~한민국! 하고 붉은악마 응원 구호를 외쳐주었다ㅋㅋ




도착한 레스토랑 내부 모습. 아니나 다를까 관광객들만 가득인 럭셔리 분위기 레스토랑이다. 사실 우린 럭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ㅋㅋ 저 뒤에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우리가 듣기에도 실력이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양쪽으로 커다랗게 걸려있는 국왕 독사진과 국왕 내외 사진. 왕비 사진 처음 보는 거였는데 역시 미인이다.

좀 럭셔리해 보이긴 해도 비싸봤자 둘이 합쳐 300디르함은 안 넘겠지. 우리 다른 동네에서도 관광객 대상 레스토랑 다녀봤자너... 했는데 웬걸, 메뉴판을 보니 죄다 코스메뉴 뿐이고 그것도 1인당 200~250디르함 ㅡㅡ 이건 그냥 런던 물가인데? 하지만 에스코트까지 받고 와서 다른 레스토랑 가기도 그렇고 돌아갈 때도 에스코트가 필요할테니 하는 수 없이 그 비싼 코스 요리들을 주문했다. 값나가는 레스토랑이라고 웨이터들도 엄청 사근거렸다. 이 레스토랑에 손님 국적별로 취해야할 행동 지침 같은 것이 있는 건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또 어설프게 대~한민국을 외치는 웨이터들. 거기에 추가로 강남 스타일~!까지ㅋㅋ 다 필요없고,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기본적으로 나오는 밑반찬이다. 맛은 다 먹을만했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일단은 쪽수로 승부하는 듯.



에피타이저로 나온 튀김. 근데 난 튀김은 별로 안 좋아해서.




내가 시킨 양고기인데 살이 너무 퍼석퍼석했다. 퍼석퍼석한 살 진짜 싫어해서 치킨 먹을 때도 닭가슴살은 다 남 줘버리는 나라규ㅠ




그래서 결국 무슈 K가 시킨 따진과 바꿔 먹었음. 하지만 이 역시도 그냥 그랬다.




인당 하나씩 나온 디저트. 생긴 것만 봐선 입에 넣는 순간 저 얋은 과자층이 바스라지면서 위에 뿌려진 달콤한 아이싱과 함께 사르르 녹을 것 같은데 이건 내 상상에 불과했을 뿐. 딱딱함과 눅눅함. 이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건 니가 처음이야ㅡㅡ 이전까지는 너그럽게 맛있다며 먹던 무슈 K도 이건 한 입 먹더니 먹지 말라고 했다ㅋㅋ




2차 디저트. 민트티와 모로칸 쿠키. 내 생각엔 그나마 얘네가 제일 나았던 것 같은데 이 땐 이미 배불러서 먹으려는 의지를 상실해 거의 다 남겼다.




그래도 아저씨들 연주는 훌륭했어.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나은 건 저 2인조 공연. 음식 생각하면 돈이 아깝지만 공연 관람비라고 생각하자.



그리 어마어마하게 받아 먹어놓고 음식은 맛도 없는데 염치 없이 팁까지 받으려는 건 아니겠지 해서 계산 후 접시에 실려 나온 거스름돈 10디르함을 당당히 집어드는 순간 웨이터가 날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서비스. 포함. 안된 거거든?

헤헷 웃으며 그 10디르함 다시 줬더니 겨우 요거 주나 싶었는지 표정 싹 굳는 웨이터ㅡㅡ^ 이것으로 여긴 모로코 최악의 레스토랑에 등극했다. 내가 웬만해선 귀찮아서 그런 거 잘 안 다는데 너넨 특별히 트립어드바이저랑 론리 리뷰 악평을 달아줄테야. 페스 여행자들이여 리아드 다르 바쓰 레스토랑 만큼은 반드시 피하라!

숙소에 돌아가는 길도 아까 그 에스코트 소년이 바래다 줬는데 가는 동안 안 통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열심히 길 찾는 법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닳고 닳은 그 웨이터들과는 달리 얜 뭔가 순수해보여서 다 데려다주고 그냥 가려는 걸 붙잡고 팁을 쥐어주었더니 엄청 좋아하더라ㅎㅎ

오늘도 이렇게 모로코에서의 탈 많은 하루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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